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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미야모토 테루의 알짜 모음 단편집 '환상의 빛 (2010)'

환상의 빛 (2010), 미야모토 테루 (宮本輝)            


원제 - 幻の光

옮긴이 - 송태욱   

출판사 - 서커스                                         


이전에 읽었던 일본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유명 작가들의 단편선 '잔혹한 계절 - 청춘'에서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무더운 길'을 무척이나 재밌게 읽어서 다른 작품도 궁금했었는데

(2017/12/03 - [읽고] - 잔혹한 계절 - 청춘 (2005), 다자이 오사무, 오에 겐자부로 외)

마침 작가의 대표작인 환상의 빛 외에도 <밤 벚꽃>, <박쥐>, <침대차> 이렇게 세 편의 중단편 모음집이라

매우 기대되고 169 페이지의 작은 사이즈라 알차게 꾸려진 모음집

 

 

소나기를 피해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읽은 단편소설이 너무 재밌어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소설같은 이유로 작가가 된 미야모토 테루는

(물론 신경불안증세로 퇴직하긴 했지만) 1977년 '흙탕물 강'으로 제13회 다자이오사무상을 시작으로 다음 해인 1978년엔 '반딧불 강'으로 제 78회 아쿠타가와상을,1987년엔 '준마'로 요시카와에이지상을,

최근 2009년엔 '해골 빌딩의 정원'으로 시바료타로상까지 수상하며 20세기 후반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대중적으로 워낙 인기가 좋아 라디오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몇 작품이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이 환상의 빛!

영화 역시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데뷔작으로 199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비롯 카톨릭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회상 등을 수상하며 이슈가 됐던 작품.

 

 

마치 돌아올 수 없는 편지처럼 죽은 남편에게 독백체로 써내려간 '환상의 빛'은 

담담한 서정적인 분위기에 쓸쓸한 여운이 은은하게 길게 남겨지는 작품.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여 나름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주인공 유미코는 경제적인 이유나 여자문제, 혹은 

건강상의 문제도 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한 전 남편에게 현재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부터

자신의 과거 등을 혼잣말하며 질문을 던지는데 역시 왜 죽었느냐가 가장 큰 핵심이겠으나

그것에 대해 캐내려거나 추적을 하는 게 아니라 치매를 앓았던 할머니의 실종사건이나 초경 날 일어났던

집안 이야기 등 남편의 원인불명 자살과는 상관없는, 

과거 본인의 불우했던 가정사를 통해 묘하게 겹쳐지는 공허함과 상실감

섬세한 여성의 심리로 전달되는데 작가가 여성으로 착각될 만큼 문체부터 상황묘사까지 탁월. ​ ​ 

두번째 작품인 <밤 벚꽃> 역시 남편과 이혼 후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중년 여인 아야코가 주인공으로

유달리 만개한 정원의 벚꽃을 배경으로 이층에 딱 하루만 하숙인으로 들인 가난한 젊은 남녀와 이를 바라보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주인공의 내적표현 등을 서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아스라하고 잔잔한 느낌.


이어지는 세번째와 네번째 작품인 <박쥐>와 <침대차>는 재미난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를 본 것 같은

비슷한 분위기로 환상의 빛처럼 깊이감도 있고 내용도 매우 인상적.

우연히 마주한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그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란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절을 회상하는 <박쥐>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에 상징적인 이미지를 배치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풀어내는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란도란 친구는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 이정진 캐릭터가 연상되서 더 재미.

중요한 거래처와의 회의를 위해 도쿄로 가는 밤기차를 탄 주인공은 같은 칸에서 만난 젊잖은 노인의 울음소리로 인해 유년시절의 친구를 떠올리며 친구의 할아버지, 현재 다니는 회사의 불편한 상사 등을 교차시키는 

<침대차>도 앞선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로 일상적인 얘기를 덤덤하게 풀어내지만 가슴 한 켠이 아리는..

 

환상의 빛
국내도서
저자 : 미야모토 테루 / 송태욱역
출판 : 서커스 2010.04.30
상세보기

 


표제작인 <환상의 빛>부터 마지막 <침대차>까지 모두 상실과 이별에 얽힌 추억들을 다뤘는데

특히나 모호하거나 뚜렷한 이유없는 죽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남아있는 인물에게서 더 깊은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며 큰 사건 상처임에도 비현실적으로 격정적으로 풀어가는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상당히 집중력있게 이끌어가기에

나지막한 감동이 오래가는 작품들